기획회의 578호는 J-콘텐츠에 대해 알아본다. K-콘텐츠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때 뜬금없이 J-콘텐츠를 살펴보는지 궁금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본 문화는 아시아 시장을 호령하던 시절이 있었고 우리보다 더 먼저 시작했고 더 많은 콘텐츠가 쌓여 있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경제, 사회뿐 아니라 문화에서도 먼저 자신만의 선을 그어놓았다. 그것을 보고 앞으로 K-콘텐츠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류를 타면서 시작된 K-POP, K-드라마 열풍은 세계로 나아가야겠다는 한국 문화 산업의 꿈을 이루고 있다. 좁은 내수 시장으로 인해 국가를 넘어선 콘텐츠와 마케팅을 진행했고 김대중 정부는 국책처럼 지원했다. (사실 국가는 판만 깔았을 뿐인데, 일본 토론에서는 자주 국가가 멱살 잡고 끌고 왔다고 생각한다. 문화는 판 깔아주고 신명 나게 놀게 풀어줘야 하는 걸 그들은 잘 모르는 걸까)
이제 K-웹툰마저 세계로 향하는 이때 우리는 국뽕에 차오르고 J-콘텐츠를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저물어가는 일본의 문화 산업은 정말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걸까?
몇 해전 불매 운동 속에서도 대단한 관객몰이를 한 <귀멸의 칼날>과 30, 40대의 향수를 강하게 자극하며 영화 시장을 흔들었던 <슬램덩크>를 보면 일본 콘텐츠 산업의 역량은 여전히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라이트 노블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내며 新판타지라는 장르를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그들이 축적해 놓은 콘텐츠는 콘텐츠 경쟁이 심한 OTT 시장에서 그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 문화는 도드라지지 않는가? 그것은 애니메이션, 만화라는 장르가 서브컬처이기 때문이다. 대중적이기보다는 마니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노래, 드라마, 영화는 더욱 대중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그 반응이 폭발적이다. 게다가 암울한 현실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일본의 스토리텔링보다 암울한 시대에 인생역전하는 한국의 스토리텔링이 더 다이내믹하고 현실호소가 잘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소프트 파워는 그 자체로의 힘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가는 콘텐츠 산업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일본의 '쿨 재팬'이었다. 국가에서 대대적인 지원을 하며 일본의 문화를 세계로 내보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주체가 명확하지 않고 무엇이 세계에 통하는지는 고민되지 않은 탁상 행정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일본 전반의 문화라는 두리뭉실한 테마로는 어느 하나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일본이 잘하는 애니메이션과 만화로 승부를 봤다면 어땠을까. 행정가들에게 서브컬처는 부끄러운 것이었을까?
일본 만화의 장점은 오랜 기간 연재된다는 것이다. 독자는 캐릭터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강한 유대감을 만든다. 이런 생명력은 일본 문화가 가진 강점이다. 아톰은 일본 산업용 로봇의 외형에 영향을 주었고 <내일의 죠>의 리키이시가 죠가 사망했을 때에는 팬들이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다.
일본은 강력한 문화 영향력을 가졌을 때에도 세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것은 자신만의 것을 묵묵히 했기 때문이다. 세계에 통할만한 것을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력 있는 인재를 발굴하여 데뷔시켰던 지난날의 JPOP과 달리 최근의 JPOP은 극성적인 팬으로만 고착되었다. JPOP은 탈출구를 한국에서 찾으려 노력했고 일본 시스템을 발전시킨 한국의 엔터는 표절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이를 받아 들렸다. 그것이 한때 투표조작으로 시끄러웠던 Mnet의 <프로듀스> 시리즈다. 많은 논란을 일으킨 프로듀스 시리즈지만, IOI, 워너원에 이어 아이즈원을 론칭하게 된다. 이 사건은 어쩌면 J-콘텐츠가 K-콘텐츠에 역전당했음을 인정하는 사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일본의 문화는 건재하다. 책 시장이 줄어드는 만큼 코믹스의 시장도 줄었지만 그 규모는 여전히 가공할만하다. 웹툰으로 일본을 역전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지만 일본 코믹스는 ebook의 지원을 받아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일본 무역수지가 적자라고 웃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일본은 경제 2위 시절에 세계에 뿌려둔 엄청난 금융자산으로 인해 벌어들이는 이자 수익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일본 문화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서브 컬처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들이 쌓아둔 콘텐츠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처음부터 '예술'이었던 것은 없다. 지금의 시대에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들도 한때는 비난을 받았던 역사가 있다. 애니메이션과 만화는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고 그 장르가 다른 예술들과 나란히 서게 된다면 그들은 또 한 번 가공할만한 힘을 보여줄지 모른다.
일본의 문화가 유독 한국에 강세를 보이는 건 사실이다. 일본으로 변역 되는 작품보다 한국으로 번역되는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K-콘텐츠가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우리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더 세계적인 모습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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