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클럽이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한 소모임을 열고 각자 읽고 싶은 대로 (사실 읽고 싶지 않으면 않은 대로) 그렇게 함께 읽고 있다. 우리 모임의 첫 번째 '내 이름의 빨강'을 2월에 읽었으니, 벌써 5개월이 지났다. 몇 달 함께 읽다 보니 조금 더 깊이 있는 독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새롭게 읽는 책은 읽는 대로 진행하고 첫 책부터 다시 꼼꼼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작가의 여러 책을 읽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스탄불'은 작가를 알아가는 마지막 책이 될 듯하다.
'hüzün'이라는 티르기예 단어는 우리나라 말의 '한'처럼 다른 나라의 언어로 품어내기 힘든 정서적인 특별함이 있다. 이난아 역자는 이를 '비애'라고 번역했고 이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한 때는 서양 최대의 도시였고 또 다른 때에는 동양 최대의 도시였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은 서양다움과 동양다움의 사이에서 고뇌한다. 위대한 도시는 한편으로는 몰락했고 한편으로는 정복했다. 단순이 서양의 시선에서 침략당한 것이 일반적 일지 몰라도 오스만이라는 기억으로 보면 당당히 정복한 역사다. 이를 두고 발끈하는 서양 역사가도 있지만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찬란한 시대 속에서도 좌절과 슬픔은 늘 함께 했으며 쇄락하는 도시는 서양의 것들을 좇으며 자신의 것을 파괴해 나가면서도 정작 서양의 것만 한 물건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자신의 위대함을 사라지는 감정과 동시에 거듭나지 못했던 도시는 그 자체가 '비애'에 휩싸여 있는 건지도 모른다. 죽은 문화. 몰락한 제국의 비애는 사방에 흩어져 있다. 서구화와 현대화는 아픈 기억들이 가득 찬 물건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허둥거리는 감각이다. 비애는 단어 자체가 주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어쩌면 이스탄불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결핍에 대한 완벽한 조화를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비애(hüzün)라는 감정은 희열에 집착한 감정이다. 이 세계에서 비롯된 상실감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비애는 존재 아니라 부재가 고뇌의 원인이 된다. 비애는 경험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고,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기 때문에 슬프다. 비애는 '절망적인 열정'으로 간주되며 이 감정의 색깔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퍼진 깊고 절망적인 고통을 암시하기도 한다.
몰락한 대제국이 남긴 유산은 자랑스럽고 칭찬받을만한 것이 되질 못했다. 예민한 감각의 사람들은 과거의 힘과 부유함이 그 문화와 함께 사라졌고, 지금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혼란스럽다는 것만을 느낄 뿐이다. 먼지와, 진흙 등의 더러움과 조화를 이룬 이 유산은 자부심을 갖는 즐거움을 가지기엔 어려움이 있다.
이스탄불의 많은 작가들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책을 쓰면서도 비애와 상실감 사이의 균형감을 잃지 않았기에 '사라진 황금기'를 찾지 않았다. 자신들이 매일 바라보았던 도시와 사람들에 대한 것을 썼다. '문명 변화'에 대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스탄불의 일반인들처럼 그들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외부에서 도시로 들어온 사람들이 흥분하는 것은 이국적이며 회화적인 모습이겠지만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자신의 추억들과 뒤엉킨 모습이 되고 만다.
오스만 제국 이전에 비잔틴 문화가 존재했던 곳. 정교회와 무슬림이 공존하는 세계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 뒤섞여 있는 도시. 이스탄불은 어쩌면 그 자체로 위대한 유산으로 보이지만 막상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정체성의 혼란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제국의 몰락과 어떻게든 따라잡고 싶었던 서양의 문화 속에서 그것과 비슷한 것들조차 만들어내지 못한 실패에 비관적이고 침울한 문화를 또 지워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융합이라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면 넓고 다양한 것이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자신의 것을 인정하는 마음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몇 번의 정복과 몇 번의 몰락을 경험한 도시에서는 쉬운 일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좋은 것이 있을 수 없다'라는 생각들은 도시에 내려앉은 비애 그 자체를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계적인 작품을 써내기보다는 서양적인 작품을 써내려 안간힘을 썼던 기존의 작가들과 달리 파묵은 이스탄불에 내려앉은 비애를 기반으로 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어쩌면 그런 '비애'는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내 이름은 빨강'에서 세밀화가의 심리는 이스탄불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튀르기예 작가보다 이스탄불 작가로 더 많이 불리는 그는 실제로도 대부분을 작품을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적었다. 몰락한 술탄과 파샤 그리고 신흥 부자들 사이의 미묘한 가치관의 차이를 겪으며 도시에 내려앉은 비애에 저항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또 부지런히 작품을 집필한다.
책은 그의 사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며 숨기고 싶은 치부 또한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은 그가 설명하고 싶은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비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비애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완성되어 가는 순간들을 함께 하며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독서 (서평+독후감) > 시집 | 산문집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의 여행가방 :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집 - 문학동네 (0) | 2023.08.24 |
---|---|
퇴사하겠습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 엘리 (0) | 2023.08.06 |
(서평) 우린 평생 전학생으로 사는 운명이니까 (케이시) -플랜비 (1) | 2023.06.08 |
(서평) 그 의사의 코로나 (임야비) - 고유명사 (0) | 2023.05.01 |
(서평) 내가 널 살아 볼게 (이만수, 감명진) - 고유명사 (0) | 2023.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