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우리를 덮친 유행병. 어. 어. 하는 사이에 갑자기 일상은 멈춰 버렸다. 중국 현지에 나가 있던 직원들의 상황과 복귀를 조율하고 그 위험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중국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인원을 뽑는 것은 고욕이었다. 2년이 넘은 지금까지 큰 무리 없이 업무를 진행하고 있지만 한 달에 한번 꼬박꼬박 돌아왔던 출장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일 년 가까이가 되었다. 타국에서 힘겹게 일하는 동료들을 보면 괜히 미안해지긴 했지만 무서운 생각은 어쩔 수 없었다.
코로나의 공포가 세상을 뒤덮을 때 가장 위험한 코호스트 병원으로 그것도 정신병동에서 봉사해 온 한 명의 의사의 이야기는 고유명사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100일 간격으로 부모를 모두 보낸 저자는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육체의 고통으로 정신의 고통을 잊고자 폭탄 같았던 격리 병원으로 향했다. 지병을 가지신 부모님들에게 다가온 질병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고 결국 운명하시고 만다. 어머니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했던 수많은 선택들은 행여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닌지 죄책감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전문가라는 사실은 그 무게가 더욱 심했으리라.
25년 의사 생활을 하고 벗어나 시작한 작가의 길이었지만 힘겨움은 그를 다시 의사로 돌려놓았다. 자신을 내던지듯 달려간 소현정신병원에서 그는 구원을 받듯 천사들을 보았던 게 아닐까 한다. 홀로 코로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던 미리암 수녀와의 만남은 그에게 구원과 같았다. 그리고 한 마음으로 환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점점 회복해 간다. 그리고 부탁을 받고 간 두 번째 격전지. 공공정신병원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자신들만을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되질 않는다. 사공이 제 잘난 맛에 노를 저으면 배는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X 염색체 23X와 아버지로부터 받은 23Y염색체로 소제목을 지었다. 코로라 봉사를 하며 겪었던 에피소드와 부모님을 보내드리며 겪었던 에피소드를 연결했다. 내 가족을 돌보는 것만큼 환자를 돌보는 일은 중요했다. 답은 현장에 있고 해결책은 관심으로부터 나온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저자는 몸소 보여준다. 지난 코로나 시절 '덕분에' 캠페인은 그런 의료진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의료 기록을 바탕으로 하는 실화다. 에세이 같기도 하고 르포 같기도 하다. 한 개인의 성찰과 고뇌로부터의 탈출 같기도 하고 우리 시대 코로나 사각지대의 고발 같기도 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환자만 보며 고공분투하는 의료진의 모습과 의료진이라는 명찰을 달고 회피하기 바빴던 이들의 모습을 함께 보여 준다. 그리고 마지막 요양 병원에서의 의료를 마지막으로 환경을 대하는 의사의 마음 가짐에 대해 간접적으로 얘기한다.
지옥 같았지만 천사들과 함께 했던 이야기. 악인은 없었지만 지옥 같았던 곳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저자는 자신의 성찰에 대한 얘기였지만 독자에겐 어쩔 수 없는 공공 정신병원의 행태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옥에도 천사들이 있었다는 점이고 그들의 날개를 꺾은 건 말도 안 되는 행정이었다는 사실이다. 비참함은 콤마 1의 숫자도 되질 못한 채 사라져 갔고 환자의 생명보다 자신들의 워라밸이 중요했던 사람들의 모습에 치가 떨린다. 무섭다면 떠나면 될 일을 현장을 일을 공보의나 간호사에게 맡겨두고 뒤에 숨는 일은 너무 심했다.
단지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저자는 내가 보기에도 단지 할 일이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적은 곳에 업무가 얼마나 과중되고 편중되는지 않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조금 잘한다 싶으면 일이 쏟아진다. 왜냐면 일을 마무리하는 사람이 그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다들 눈치 보면 쉬쉬한다. 능력 없음을 응징하지 않으면 다들 그게 미덕이 된다. 괜히 나서서 일을 받아오면 꾸지람을 듣는다. 조직이 썩어 가는 걸 막는 건 쉽지 않다.
의사이지만 작가이기에 글이 너무 재밌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아주머니들이 왜 막장을 보는지 이해가 가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감사했다. 코로나가 흔해져 버린 지금 오히려 다행이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난날의 감사함은 늘 그렇듯 자연스레 잊히고 있다. 그런 세상이 되고 있다는 건 분명 보람찬 일일 것이겠지만 우리의 마음에서는 사라지고 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상흔을 치유하는 일도 필요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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