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의 한 명으로써 그는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위해 디자인을 통해 해법을 제시한다. 대가는 하나의 작품을 위해 노력함을 넘어 세상을 생각하고 있다. 더욱 낮게 더욱 천천히 세상을 세심하게 관찰하자는 그의 <저공비행>은 지금의 시대에 그가 던지는 하나의 해결책이다.
성장이 멈춰버린 일본에 던지는 하라 켄야의 질문은 비단 일본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서구권 아니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그의 통찰과 디자인으로서의 풀이법을 설명해 나가는 이 책은 안그라픽스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이제껏 우리는 높이 나는 새를 모티프로 삼았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먼 미래를 보고 더 먼저 준비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높이 나는 것이 전부가 아닌 듯하다. 미세먼지가 가득 차거나 폭풍우가 몰아친다. 높이 나는 것이 의미가 사라진 듯하다. 각자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지만 방향이 명확하지 않다.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사람들도 기후 위기에 멈춰야 한다는 사람들도 넘쳐 난다. 미래에 대한 준비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간다. 일등을 좇는 것이 희망을 향해 가는 것인지 절망을 향해 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에 대해 보다 섬세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지구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은 단일화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희석되어 평균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계는 많은 것을 공유하지만 각자의 것을 만들어 간다. 문화라는 것은 로컬에 존재할 때만 특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후추가 귀했던 서구에 아낌없이 사용하는 후추를 제공한 동양의 향신료라든지 보기만 해도 매워 보이는 훠거에 들어간 아메리카의 고추가 그렇다. 식재료는 연결되었지만 그 문화는 더욱더 독특해지고 있다. 문화 또한 그렇지 않을까. 우리에겐 우리의 것을 더욱 갈고 다듬어 세계에 내어 보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위한 저공비행이다.
어쩌면 K-컬처로 대표되는 우리의 문화는 이미 저공비행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여러 장르를 섞어 다이내믹하고 독특한 음악으로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K-팝이라든지 우리의 문화가 적절히 섞인 K-드라마가 그러하다. 영화는 꽤 오래전부터 약진을 하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도 '저공비행'은 필요하다. 문화 산업을 넘어서는 국자 자체의 비전을 위해서 말이다.
본업이 아닌 활동에는 사실 미래가 잠들어 있다.
당장은 도움이 안 될 것 같아도 몸을 던져야 하는 행위에는 일의 본질이 숨어 있다.
분명 지금 '나를'를 포함한 '우리'에게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고 있다.
디자인의 역할은 '본질을 꿰뚫고 가시화하는 것'이다. '저공비행'은 제대로 알지 못했음을 깨달아가는 여행이며, 이 땅이 지닌 잠재력에 눈을 뜨는 체험이다. 세상은 글로벌화할수록 지역의 고유성이나 전통과 문화에 관심을 가진다. '글로벌'과 '로컬'은 반대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부각하는 말이다. 정밀 제조업으로 편향된 일본의 산업은 '관광'이라는 산업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공업 국가로 여전히 관광이라는 카테고리에 대해서는 미숙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관광과는 조금 다른 접근도 필요하다. 과잉 관광이 아니라 정말 즐기고 싶은 관광에 대해서 말이다.
하라 켄야가 던진 화두는 '럭셔리'다. 이는 호화롭다는 뜻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럭셔리'라고 번역한 것보다 그냥 고급스러움이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하라 켄야는 로컬 자체에 집중하려고 한다. 지구에서 가장 앞섰던 동양은 약탈 보단 우러러 봄을 원했다. 하지만 치열했던 서구는 닿는 족족 파괴하고 약탈했다. 동쪽 끝에 있던 일본은 중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빠르게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다.
메이지 정부가 내세운 정책은 자국 문화를 버리고 서양화로 전환하는 극단적인 것이었다. 이는 제국주의 색깔이 강했고 결국 부국을 향한 욕망은 아시아 패권을 노리는 폭주를 억제하지 못했다. 일본이 지금도 역사를 규탄받는 이유는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서양 열강과 같은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남은 것은 310만 명의 전사자와 핵폭탄으로 잿더미가 되어 버린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였다. 그리고 주변국의 원망을 더할 수 있다.
일본은 평화 헌법으로 인해 미국의 비호 아래 경제 발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국우선주의로 바뀌는 지금의 시점에 미국은 극동의 다른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는 생각해야 할 문제다. 일본은 평화 헌법을 지닌 국가로서, 근대사에 입각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어떤 미래 비전을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대부분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나라들이 저지른 실수는 가스를 사용한 조명 기술을 배우기만 하면 되는데, 가스등의 형태까지 받아 드린 것이다. 전형적인 데드카피의 전형이다. 문명개화로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뤘지만 전통미를 잃어버렸다. 유럽풍이라기보다는 무국적풍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듯한 집의 구조는 그저 넓고 호화로운지가 그 기준이 되어 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인테리어로서의 독창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전통미를 불쑥 내미는 것은 불편함이다. 우리는 '환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통미를 바라보는 내국인과 외국인의 시선은 분명 다르다. 이것은 해석과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입장 차이일 뿐이다. 곧 '손님의 시선'과 '주인의 시선'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일 수 있다. 일본스럽다, 한국스럽다를 해석하는 것이 주인과 손님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이다.
ex-formation을 얘기하는 하라 켄야는 이 책에서도 자연과 전통에 대해 집중한다. 인공과 자연의 자연스러운 결합을 시도한다. 그는 호텔이라는 것을 조명해서 설명한다. 자연 속에 녹아든 자연스러우면서도 전통적인 고급스러움을 얘기한다. 격동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두 대륙판 위의 일본은 재난의 나라면서도 그로 인해 풍성한 토양과 산새 그리고 온천을 가졌다. 태풍이 몰아치는 덕분에 풍부한 물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 속을 살아왔던 선조들의 자연에 대한 순응을 얘기한다. 그런 것들의 일본스러움을 관광의 고급스러움에 접목해 본다.
자연은 인간을 보호가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로 두면 인간을 집어삼킨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지나쳐 자연을 보호하자는 운동이 대세다. 인공이 넘치는 시기에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하려는 습성 또한 인간의 것이다. 그 균형을 맞추는 작업이 '청소'이며 청소는 그 본질이다. 청소라는 개념은 '정원'으로 이어진다.
너무 인공적이면 촌스럽다. '적당한 편안함'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며 '인위와 자연의 경계'가 꾸준히 관리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류는 '메타'라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진입을 위해 노력한다. 가상과 현실 두 세계에 적응하려 애를 쓰고 있다. 그리고 패권주의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멸망으로 향한 기차 위에서도 인간은 서로 싸우고 있다. 인간은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미래를 향한 비전에 자연을 두려워하던 예전의 자연주의자의 모습을 더하는 것은 어떨까. 메타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되더라도 자연과의 연결은 필요할 것 같다. 전에 없던 새로운 것에 대한 자원을 향해 시뻘건 눈으로 달려들지 말고 지금까지 함께 했던 우리의 재산 혹은 자원을 재인식하는 것은 어떨까? 세상은 혁신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 과거부터 지켜오던 빛을 잃지 않는 것 또한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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