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사은품으로 선택하게 된 시집. 문정희라는 이름이 낯이 익어 선뜻 골랐다. 사실 시집이라는 건 쉽게 이해하기 어려워 늘 윤동주나 김소월의 시를 읽었다. 조금 더 살펴보면 한용운 정도까지가 나의 시의 영역이다. (아.. 도종환, 류시화 시인도 있구나.) 그럼에도 집에 제법 많은 시선집이 있는 것으로 봐서 꽤나 시를 잘 읽고 싶단 생각이 있는 것 같다.
꽤나 오랜 세월을 시를 적어 오신 분이며 요즘 시들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시대를 품은 시들이 많았다. 여성에 대한 얘기도 많이 하고 있다. 조금은 혁명적인 느낌도 있고 강한 메시지도 내보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인 김명순과 수많은 명저를 소개한 김수임을 소환한다.
김수임은 리강국과의 연인 사이로 같은 빨갱이 혐의로 사형당했다. 하지만 훗날 리강국은 미국 정보원으로 밝혀졌다.
소나기보다 흔해 빠진 한 줄기 사랑
별보다 더 높은 것 같지만
실은 아무 권리 없는 이름을
선물 받은 그 여자는
한강변 돌자갈 위에서
쇠사슬을 끌고
여간첩의 이름으로
총살형을 받았다.
문정희 , '애인' 中에서
김명순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다. 그녀는 5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였다. 당시 최고의 엘리트에 엄친딸이었던 그녀는 성폭행이라는 사건에 씌어 '헤픈 여자', '건방진 여자'가 되어 성적 희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문단의 공격 속에서 <탄실이와 주영이>라는 작품으로 그녀의 아픔까지 용기 있게 고백한다. 남성 문인들의 끊임없는 괴롭힘과 언어 성폭력 속에서도 많은 작품을 통해 오해를 벗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은 재평가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많다. 문정희 작가 또한 그중 한 명이다. 그리고 김명순을 비난한 대부분의 남자들은 친일파였다. 친일파가 아닌 사람으로는 방정환이 유명하다. 우리가 아는 어린이날의 방정환이 맞다.
사실 리뷰를 적기엔 책 말미에 붙어 있는 박혜진 문학 평론가의 글이 너무 완벽하다. 주옥같은 글은 바로 이런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을 넘어 세계관까지 설명하는 글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알려진 문정희 작가는 '비명과 독백'의 언어로 하는 곡시를 바탕으로 하는 게 아닐까. 민족적 아픔인 식민지 속에서는 '여자라는 또 다른 식민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불쑥 말했어
애국심은 팬티와 같아 누구나 입고 있지만
나 팬티 입었다고 소리치지 않아
먼저 팬티를 벗어야 해
문정희, '작가의 사랑' 中에서
애국심을 종용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를 얘기하고 싶었을까. 찰스 부코스키의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라는 문장을 끼어 넣으며 팬티는 지옥과 동급이 되는 게 아닐까. 애국심은 지옥 같지만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었던 건가.
작가에 대한 헌시가 유독 많아 보이는 작품집이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현재에 하고 있다는 점은 과거가 현재에도 존재하고 여전히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금은 나아진 세상에 조금은 유명해진 자신에게도 경계를 말을 던진다.
유명이란 입맛을 확 당기는
소금과 설탕의 합세
놀라운 과장과 미화
두려움 없이 집어넣은 소금과 설탕이
치명적인 합병증을 불러올
이 시대 부화뇌동의 언어들을 떠올린다.
문정희, '소금과 설탕' 中에서
박혜진 님의 <말하지 않아서 인식되지 못했던 무수한 삶의 간극들이 시인의 호명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시인이 반세기 동안 쉬지 않고 해 온 그것. "항상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라는 글처럼 시인은 세상이 불리지 못한 이름을 계속해서 드러내려고 했던 것 같고 그렇게 시인은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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