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말이죠..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이미 두 딸을 제법 키운 옆팀 팀장님은 가끔 가족 얘길 한다. 그날은 딸아이의 첫 생리에 대해 얘기를 해주었다. 무슨 얘길 하다가 그 얘기까지 닿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친구들끼리 시내를 놀러 나가게 해줘야 하는 게 몇 살부터일까라는 얘기를 하던 중이었던가..
"스테이크를 했어요. 딸애는 나가서 먹자 그랬던 거 같은데.. 아빠가 그냥 해주고 싶어서 그래.. 그냥 먹어라고 했죠"
"그게 말이죠. 기분이 묘해요."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 중이다. 동료이기 이전에 인생 선배로서 회사에서는 몇 안 되는 결혼 옹호론자다. 190cm에 이르는 덩치에 비해 섬세하고 다정하다. 이사하며 빈 집을 쳐다보며 아이들과의 흔적이 눈에 밟혀 울었다는 이 팀장님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업무적으로도 노력파지만 정서적으로 잘 맞다.
'우리 딸. 생리 터짐'
'조만간일 것 같았는데, 이리 일찍 조만간인 줄은 몰랐네'
아내의 톡이 화면 위에서 고개를 내민다. 축하해줘야 하고 행복한 날이라는 기분이 들게 해줘야 한다는 자기 암시 속에서도 심란함이 덮친다. 아.. 이게 팀장님이 말씀하신 그런 건가..
'멜랑꼴랑하다는 기분이 이런거군 ㅋㅋ'라고 보낸다.
'나는 뭐를 설명해줘야 해서 멜랑꼴랑 한지도 모르겠음'라고 아내가 답한다.
학교에서 잘 배운건지 성격이 원래 무던한 건지,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는 아내도 그렇게 허둥대지 않았던 기억 밖에 없고 어떻게 잘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에 역시 집안 내력인가 싶기도 하다. 나도 생리적인 현상에는 큰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라서.. 트림이든 방귀든.. 뭐든..
몇 일 전 아들이 정자는 남자 몸속에 있고 난자는 여자 몸속에 있는데 어떻게 만나?라는 기습 질문을 했단다. 아내가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딸은 배를 내밀곤 이래이래 하는 거지. 라며 몸개그를 했단다. 어디서 본 건지.. 심오한 질문이 개그로 승화되며 웃음으로 마무리되어 버렸다.
그러고 보면 다 큰 녀석이 여전히 씻겨 달라고 어지간히 귀찮게 했었다. 5학년이 올라갈 때까지 드문드문 씻겨 줬던 거 같다. 동생 하고도 곧잘 씻곤 했는데 그러고 보면 무감각한 건지 개방적인 건지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턴 프라이버시를 만들어줘야 할 것 같아서 아주 귀찮은 듯 '이제 혼자 씻어~' 라며 거절하기도 하고, 동생이랑 따로 씻어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알몸으로 거실을 질주한다.. 햐... )
그런데 아주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살짝 당황스럽긴 했다. 훌쩍 커버린 느낌도 든다. 요즘은 성조숙성 때문에 부모들이 고민이 많다. 행여 생리를 일찍 시작할까 봐 한약을 먹이기도 하고 신 음식을 피하게 된다. 여자 아이에게 신 것들은 빠른 여성화를 가져온다고 해서 좋아하는 신 과일들 못 먹게 하고, 빨리 안 잔다고 엄마는 매일이 스트레스였기도 했다. 이제 평균적인 시기에 시작하게 되었으니, 엄마의 고민은 해방될까.
얼마 전 생일에 케이크가 두 개 들어오는 바람에 하나는 손도 못 대었는데,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나 싶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생리 축하합니다'로 바꿔 불렀다. 고기라도 해 먹이고 싶지만 갑작스럽고 평일이라 쉽지 않아 주말에 먹고 싶다던 '월남쌈'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꽃다발을 살까 했는데.. 나무가 조금 더 의미 있을 것 같아서.. (사실은 나무가 예뻐서) 선물했다. 뭐든 기분 좋게 받아주는 딸이 좋다.
인생의 큰 일을 치른 느낌이다. 나보단 아이에게 더 큰 일이겠지만.. 오히려 더 아무렇지 않은 것 같다. 학원 단어 시험에서 일등을 한 건 단어가 쉬워서였는데.. '생리가 행운을 가져다줬나'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특별한 날이 기분 좋은 날이 된 거 같아서 다행이다.
자기 방을 치워 금세 벤자민 나무를 가져다 올려 둔다. 아이와 나무가 오랜 시간 잘 자라 주길.. 인생에 특별한 날이 또 하나 늘었다.
'글쓰기 +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권의 필사 노트 워드 작업 완료 (0) | 2023.03.09 |
---|---|
원래도 사 먹는게 더 좋아. (0) | 2023.03.06 |
우리 가족 행사 주간 (1) | 2023.02.20 |
두 아이의 독서 성향 (1) | 2023.01.25 |
레이 달리오의 원칙 : principlesyou.com 설문지 결과 (0) | 2023.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