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에 대한 얘기를 할 때에는 다수가 행하는 소수에 대한 횡포 정도 정의할 수 있지만 대체로는 강자가 약자를 대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조금 독특하다. 자신의 주무대가 아닌 곳에서도 강자들은 약자를 억압하는 모습을 늘 보여왔다. 그리고 그것은 분노와 공감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반면 이 작품은 강자가 약자를 대하는 모습, 약자가 강자에 분노하는 모습 그리고 그 사이에 끼여 있는 인물을 묘사하며 여러 면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실제 작가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으며 사실감보다는 세밀한 감정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마니아나와 똑 닮은 삶을 살았던 작가의 멕시코에서의 이야기. 저널리스트로서 사회의 아픈 민낯을 들추어내는 이 작품은 픽션인지 에세이인지 알 수 없는 경계선을 넘나 든다. 이 책은 은행나무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폴란드의 왕족이며, 멕시코계 어머니를 둔 저자는 실제로도 귀족이며 멕시코에서 살며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기사와 책을 쓰는 저널리스트다.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 소설과 차별되는 면이 있다. 굉장히 짧은 문단들이 이어 붙여져 있다. 마치 짧은 인터뷰 같은 문장들이다. 유려하게 흐르는 문장을 품은 소설이 아니라 장면 전환이 굉장히 많은 느낌이 있다. 어디까지가 경험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차라리 에세이라고 하는 이해하는 편이 나을 정도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가족, 마리아나, 소피아, 루스는 프랑스를 떠나 멕시코로 이주하게 된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였고 아버지는 프랑스군으로 징집되었고 어머니는 멕시코계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멕시코로 떠나기 전까지 어머니가 멕시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멕시코에는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환경 그리고 새로운 가족이 있었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은 어떻게 보면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소피아는 당당하며 다른 사람들의 눈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마리아나는 관찰력과 호기심이 많지만 내성적이며 순종적이다. 루스는 이성적이지만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할까. 그리고 빌런으로 퇴펠 신부가 등장한다.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책을 읽으며 줄곳 의문이 드는 생각이었다. 반 정도의 이야기는 잔잔한 에세이 느낌이 강하며 마리아나가 화자가 되어 여러 상황을 설명해 주는 느낌이다. 할머니, 어머니, 하인들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실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지 종잡을 순 없었다. 완벽해 보이는 어머니 루스, 얽매이지 않는 성격의 동생 소피아에 대한 동경. 어쩌면 고독에 대한 이야기, 그런 존재에 대한 이야기 인가 싶었다.
퇴펠이라는 신부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방향을 전환한다. 이것을 투쟁의 이야기가 될 것인지 스릴러가 될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물론 책 소개를 감안한다면 인권에 대한 얘기로 전개될 것이라는 것 정도만 어렴풋 느낄 뿐이지만 마치 혁명가 같이 등장한 퇴펠이라는 신부는 책을 읽어낼수록 모순적인 인물이 되어 간다. 어느새 혁명가는 사이비 교주 같이 느껴졌고 그가 말하는 여성 해방은 어느새 여성을 현혹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타락한 사제와 혁명가의 이미지를 연이어 보여주는 그를 어느 쪽에 두어야 할지 몰라 혼돈스러웠다. 마지막에 가서야 역시 첫 느낌은 틀리지 않는군이라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귀족 사회라는 안전망을 벗어난 가족들은 처음으로 계급에 대해 느꼈을지 모른다. 하인은 원래부터 하인이었기에 그것에 대한 특별한 정의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멕시코에서는 달랐다. 멕시코를 착취하는 많은 프랑스 귀족들을 '양키'라고 불렀고 멕시코스럽지않다고 공격했다. 퇴펠은 자신들의 특권을 내려놓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으라며 주장한다. 마리아나는 그를 신처럼 추앙하기에 이른다.
고독 속에 갇혀 있던 마리아나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어머니 루스는 그런 존재다. 문장 곳곳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완벽함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퇴펠에 대한 믿음 또한 그러하다. 멕시코인으로 프랑스에서 살아온 루스 또한 어쩌면 고독했는지도 모를 노릇이다. 프랑스 공동체에서도 멕시코 공동체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혼혈인 소피아와 마리아나 또한 그러하다. 그들에게는 혁명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고 신처럼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이겨낸 건 자신을 사랑한 소피아뿐이다.
책은 마리아나의 성장 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읽다 보면 루스의 성장 소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마리아나가 방황 속에서 사랑을 느끼고 변화를 꿈꿨지만 그 무엇도 이뤄내질 못한다. 그저 퇴펠 신부의 모순만 확인할 뿐이다. 그녀의 고독과 신념 그리고 사랑은 굉장히 복잡 미묘해서 마음에 전해지는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은 얼마나 고독할 수 있는가? 그녀를 이해하는 것보다 이해할 수 없는 쪽이 더 많은 이유가 남자이기 때문일까?
반면 루스의 성장은 확실했다. 멕시코인, 프랑스인의 정체성 같은 것에서 벗어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멕시코에서 프랑스어를 배워 놓고, 파리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으면서, 멕시코 음식을 먹으며 자란 그들이 프랑스인 척하는 것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하인이 화상을 입었을 때 어떤 남자의 도움 없이 당황하지 않고 지시를 내리고 상황을 수습했다. 루스는 퇴펠에게 기대던 마음의 변화를 가졌다. 그 순간 퇴펠은 천사에서 악마가 되었다.
이방인으로서의 삶 속에서 겪는 고독을 다룬 작품이며, 그 속에는 사회에 대한 고발이 담겨 있다. 그들을 깨운 것은 퇴펠 신부였지만 그는 '천사'이면서 '악마'이기도 했다. 그의 말은 혁명을 말했지만 그의 행동은 권의 속에 갇혀 있었다. 인종 차별, 여성 차별 그리고 신념에 대한 맹목적 충성의 부작용. 그런 것까지 얘기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사이비 교주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는 나였기에 퇴펠의 언어는 사기꾼의 언어 같았고 그 말이 정당했지만 공감할 순 없었다. 그리고 왜 고통을 수반하여만 깨우칠 수 있는가? 에 대해 또 한 번 의문이 들었다.
스토리가 아닌 마음을 읽어내야 하는 작품이었기에 쉽지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이 작품은 소설이라고 보단 르포의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함께 괴로워하고 공감하기보단 타락한 종교에 이성을 맡기는 행위 대한 거부감이 더 많이 들었던 것은 내 속의 방어기제가 작동했음이다. 아, 이 어쩔 수 없는 이과형의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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