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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인간이 만든 물질, 물질이 만든 인간 (아이니사 라미레즈) - 김영사

야곰야곰+책벌레 2022. 12. 1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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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과학서가 있지만 이 책은 조금 독특하다. 기술의 인간미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과학윤리에 관한 얘기일 수도 있다. 그동안 과학서가 인간보다 기술에 집중한 나머지 과학자의 인간적인 면보다 위대한 면을 부각하기 바빴고 그로 인해 위대함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라는 인식을 심어줬다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그동안의 패턴과 조금 달라서 읽다가 내용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생겼지만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이 가져온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얘기하고 좋은 면과 나쁜 면이 공존하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면 사뭇 흥미진진해진다.

  스탠퍼드 재료공학부에서 유일한 흑인으로 공부를 마치고 예일 대학교 부교수로 재직했지만 학계보다는 과학을 알리고 싶었던 저자는 과학 커뮤니터가 되었다. 재료과학자가 들려주는 또 다른 시각의 과학은 김영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책의 챕터는 8개의 동사로 표현된다. 이 제목은 과학이 이뤄낸 인간 사회의 변화며 키워드다. 시계는 세계를 교류하게 만들었고 강철은 미국의 철도 산업을 이끌며 세계를 연결했다. 통신은 정보를 전달했고 사진은 포착했다. 빛은 밤에도 우리가 볼 수 있게 해 줬고 축음기는 서로의 문화를 공유할 수 있게 해 줬다. 유리는 많은 발견을 도왔고 인터넷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기술이 가져다준 사회 변화의 절묘함을 알아가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과학은 기술 그 자체로는 위대한 발견 혹은 발명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도덕적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기술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사회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발명은 오랜 시간 숙성되어 완성되지만 우리는 최후 발명자만 기억하고 찬사를 보낸다. 이 책은 그런 면을 채워주는 책이다.

  시계의 발명은 인간에 분할 수면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깨어나고 활동하고 다시 잠들기도 했다. 생태계의 대부분의 동물들은 분할 수면을 한다. 낮잠이라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시계의 발명은 잠드는 것을 해악으로 여기게 되었다. 밤에 잠들지 못하는 게 병이 아닌데 우리는 병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더불어 여유를 가지고 행동하던 행동은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습관으로 바뀌었다. 올더 헉슬리는 이를 '속도의 해악'이라 했다.

  모스 신호로 알고 있는 인간의 최초의 전신은 초기에 매우 비싼 이용료를 지불해야 했다. 노동자의 주급의 10%에 달하는 이 비용 덕분에 사람들은 최대한 짧은 문장을 만들어 보내려고 노력했다. 문장은 간결해졌다. 우리는 속도를 얻는 대가로 정서와 감정이라는 것을 제거하고 말았다.

  몇 해 전에 미국에서 진행한 얼굴 인식이 흑인을 인식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기술을 만든 사람도 백인이었고 샘플링의 대상도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기술은 이렇게 본의 아니게 차별을 가져온다. 그런데 이런 일이 더 오래전에도 있었다. 초기 필름은 노출의 양이 적당하지 않았기에 흑인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에 흑인들은 차별에 대한 불매운동과 사회적 운동을 하였고 필름 제조사는 이를 해결한 필름을 만들어냈다. 

  전구는 우리의 낮을 더욱 길게 해 줬지만 생태계에는 재앙과 같았다. 곤충의 70%는 야행성이며 한밤에 뿜어져 나오는 빛은 많은 곤충을 죽이고 있다. 반딧불이는 빛을 내어 암컷을 유혹하는데 빛이 넘쳐나는 세상에 수컷의 빛은 더 이상 매혹적이지 않다. 빛은 인간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특히 푸른빛은 잠에서 깨는 영향을 준다. 푸른빛이 줄어들면 우리 몸은 회복의 시간을 시작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푸른빛으로 채워지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푸른빛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떨어지는데 이는 눈부심으로 나타난다. LED로 교체되는 가로등과 라이트가 노인 운전자를 더 큰 위험에 빠트리게 된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자다 깨었을 때 푸른빛에 20분 정도 노출되면 더 이상 잠들 수 없다. 우리는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빛 공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암막 커튼과 안대를 착용하고 잠든다.

  축음기나 디스크는 서로 어울리지 못한 백인과 흑인의 문화를 교류시켜줬다. 사람은 어울리지 못했지만 음악은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많은 믹싱 장르가 생겨났다. 유리는 투명하기에 많은 분야에서 사용된다. 광학계는 물론 그릇이나 전등의 보호 용구로도 사용된다. 배합률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유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유리는 실험 도구에도 필수품인데 그런 것에 걸맞은 제품을 만들어 낸 것은 발견의 초석이 되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게르마늄 단결정의 생산으로 인해 시작된 트랜지스터와 컴퓨터의 발전은 지금의 시대를 이끌고 있다. 많은 정보는 이제 머릿속이 아니라 네트워크 상에 존재한다. 무엇이라는 기억보다는 어디에라는 위치 정보가 더 중요해졌다. 정보를 외우는 대신에 찾을 수 있는 위치만 기억하는 것이다. 인간의 진화는 몸 밖으로 펼쳐지고 있는 중이다. 도킨스는 이를 두고 '밈'이라고 했던가. 덕분에 우리의 뇌도 변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 많은 데이터를 연결할 수는 있지만 이를 이해하고 통합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하이테크의 아버지쯤 되는 스티븐 잡스나 빌 게이츠도 아이들 교육에는 누구보다 로우테크를 지향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책은 과학 전반에 이뤄진 역사적 사건의 단편이 아닌 스펙트럼처럼 펼쳐서 보여주고 있다. 기술이 가져온 인간 사회의 빛과 어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기술은 소수의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논의는 소수이 것이어서는 안 된다. 기술이 가져오는 어둠에 대해서 누구나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개선하는 것 또한 모든 사람의 몫인 것이다. 그것을 위한 하나의 초석 같은 책이다. 

  엄청난 양의 레퍼런스를 보면서 저자가 얼마나 많은 자료를 정리해서 이야기를 이어 붙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설명 또한 담아 두었다. 기술을 만든 인간에 대한 이야기. 기술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 의도하지 않았지만 분명했던 차별에 대한 이야기. 과학 커뮤니케이터로서의 균형감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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