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서평+독후감)/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 창비

야곰야곰+책벌레 2022. 10. 25. 14:26
반응형

  여수와 순천 옆에 붙어 지리산 아래 붙어 있는 구례군. 나에게는 자연드림에서 달걀을 살 때마다 만나는 아주 친근한 곳이기도 하다. 구례에 살던 작가의 아버지는 여순 사건 때 빨갱이로 낙인찍힌 채 살아왔다. 작가 또한 빨갱이의 자식으로 긴 세월을 지내왔다. 4년간의 짧은 사회주의 활동이었지만, 남한에서 용서될 수 없는 사상이었던 시절이었기에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아버지의 죽음은 빨갱이라는 낙인에서 해방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빨갱이의 딸인 작가가 빨갱이 아버지를 놓아주고 진정한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과정이었다. 뭉클하다가도 웃음 짓게 되는 내용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마지막엔 나를 무장 해체시키며 눈물이 찔끔 나게 만들어 버렸다.

  아버지의 해방 일지라고 적혀 있지만 이것은 작가의 해방 일지라고도 할 수 있다. 빨갱이의 딸로 살아오면서 인식한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하는 동시에 아버지로 돌아오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상의 문제보다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조명해보는 시간이었다. 인간이 종교를 가지고 사상을 가지는 것은 모두 잘 살기 위함일 것이다.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작품에 속에서 시종일관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그런 것들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오히려 가부장적이지 않고 현실적이기까지 했다. 한겨레를 보는 아버지와 조선일보를 보는 박 선생 사이의 다툼도 그 사이의 끈끈한 정도 모두 이를 반증하고 있다.

"생각이 다르면 안 보면 되지, 애도 아니고 맨날 싸우면서 왜 맨날 같이 놀아요?"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


  호의를 베푼 사람이 훔쳐 간 마늘 반쪽, 감옥에서 만난 여호와의 증인, 장애를 가진 작가의 선배를 대하는 아버지의 행동은 늘 차별이 없었다. 사상, 종교, 다름에 대한 다툼이 있을지언정 사람을 보는 눈은 다른 기준으로 보았다. 지금의 사회보다 더 평등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었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아버지는 빨갱이기 이전에 구례 사람이었고 구례 사람의 이웃이었다. 사회주의자와 민주주의자가 서로를 챙기는 모습은 지금의 사회보다 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 명의 사상가이기 이전에 동네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는 오지랖 넓은 아저씨였고, 담배 피우는 아이에게조차도 상대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어쩌면 참된 어른의 한 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혁명 동지인 어머니가 고생이 많았지만..) 

  더없이 좋은 이웃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아팠다. 큰집의 조카는 육사에 합격했지만 진학하지 못했다. 사건이 생기면 여지없이 구속을 하러 달려들었다. 그런 나날들에서도 아버지는 자신을 쫓던 경찰과도 막걸리는 나누는 호의를 보였다. 법과 사람을 아주 자연스레 나눠 볼 줄 아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낙인 속에 자랐을 작가는 혁명가도 일반인도 아닌 그런 어중간한 어딘가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자신에게 쓰인 굴레는 세상의 삐뚤어진 시선과도 싸워야 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장례식장을 들리는 손님들과의 기억을 더듬으며 사상가인 아버지를 놓아주고 누구보다 잘 놀아주고 예뻐해 줬던 아버지를 찾게 해 준다. 아버지의 마음은 사상과 관계없이 아버지였던 것이다. 

  책은 너무 재밌고 감동적이었다. 울고 웃을 수 있다는 후기가 무슨 말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무거운 주제에 어떻게 보면 민감한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만 글은 너무 위트 있었다. 작가가 깔아 둔 감정선을 타고 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에 닿아 있다. 이 책을 읽으니 김정현 작가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완전 다른 형식에 다른 스토리지만 그 글이 품은 감정을 너무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이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21세기 최고의 사상가를 묻는 질문에 27.93%가 마르크스를 뽑았다. 권력을 부셔야 한다고 외쳤던 혁명가는 혁명 그 자체가 권력일 수 있음을 간과했을까? 사회주의는 독재의 색을 띠고 러시아와 중국에서 싹을 틔웠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등에 업은 북한과 싸웠다. 어쩔 수 없는 대치일 수도 있다. 지금의 시대에 이런 책 한 권 읽었다고 호평을 내렸다고 사회주의 프레임을 뒤집어 씌우는 언론이 있는 곳이 한국이다. 그럼에도 21세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의 한국에서 사상 검증하듯 내편 네 편을 가르는 정치판과 추종자들이 판을 치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해졌고 사상은 어느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다.

  사상을 논하는 책도 빨갱이를 미화하는 책도 아니다. 그저 이해할 수 없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 속에 글은 많은 감정을 드러낼 뿐이다. 여순 사건은 지금은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이다.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해 골라 놓은 여순 사건의 책을 읽을 생각이지만 그 모든 것을 덮고서라도 이 책은 모든 면에서 좋은 책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