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서평+독후감)/소설

부끄러움 (아니 에르노) - 비채

야곰야곰+책벌레 2022. 10. 2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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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 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이 나를 이끌어 이 책을 만나게 되었지만 역시 얇으면서 쉽지 않은 책이었다. 저자의 책은 저자의 일대기를 이해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자의 해석은 주요했다. 1인칭 시점의 작품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 적었던 저자의 고집 때문일까. 소설과 에세이 어느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철저하게 객관적인 자기 회상으로 글을 적는 작가에게 자기 검열은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자신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치부를 드러내면서 떨쳐버렸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작가의 작품 중에서는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라고 시작하는 이 문장은 강렬하다. 격렬한 싸움 속에 드러난 폭력성 하지만 "자, 이젠 끝났다"라는 말과 함께 아무렇지 않게 나갔던 산책. 화자에게 특별했던 6월 15일의 그날은 그저 지나가는 날짜의 흐름 속에 아무렇게 지나갔다. 

  그 뒤로 이어진 내용들은 어쩌면 부끄러움을 만들어내는 사회에 대한 조용하면서도 세밀한 묘사가 이어졌다. 기독교 사립학교를 다니는 여성의 행동거지, 서로의 사정을 뻔히 아는 작은 마을에서의 겉치레. 억압된 삶이라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다정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그것들을 강제한다. 행여 그것에서 이탈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된다. 

진정한 프랑스 여자란 변함없이 영원토록
자기 가정과 조국을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기도드리는 여자이다.

  기독교 학교 학생이라면 가지고 있을 <어린 소녀 브리지트>의 서문. 여자를 강제하는 사회를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눈 밖에 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된다. 

  화자가 그런 부끄러움을 깨닫게 된 것은 축제를 하고 귀가한 집 앞에서 만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기독교 학교의 시선으로 어머니를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천박함으로 느껴졌다. 수많은 가면이 벗겨져 알몸이 된듯한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물이다. 그것을 부끄러움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자는 더 이상 부끄러움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마저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가정사를 서두에 내밀며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작가. 이것은 깊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들려줘도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작 부끄러운 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 맞게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가정이 아무리 폭력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일지라도 사회가 개인에게 들이대는 잣대만큼 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더 평등한 삶일지도 모른다고 외치는 듯하다.

  1952년 세상에서 벌어지는 전쟁. 작가들은 부끄러워한다고 했지만 그들의 선택적 부끄러움은 진정성이 있는가. 그런 면에서 자신이 살아온 그리고 부끄러워했던 그 치부는 그것들에 비해 전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타인의 시선을 견딜 수 없는 책을 쓰고 싶었다는 저자는 오히려 자신에게 명분을 주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굉장히 평범해 보이면서도 깊은 메시지가 있는 작품이다. 단지, 작가를 알아야 한다. 역자의 설명은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 반대로 역자의 해설을 먼저 읽고 읽는다면 깊이 있는 독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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