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릴레오 북스 74, 75화는 한글날을 기념하여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 쓰기>를 다뤘다. 이오덕 선생과 한 시대를 살아온 이주영 어린이 문화연대 대표님이 함께 해 주셨다. 유시민 작가는 글쓰기 강의에서 항상 자신이 쓴 글을 읽어보라고 했는데, 읽었을 대 자연스럽지 않은 글은 좋은 글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이번 편에서 알 수 있었다. 우리 글에는 우리말의 리듬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우리 글을 제대로 쓰질 못해서 리듬이 깨진다는 것이었다. 유시민 작가가 마음속 스승으로 생각하는 이오덕 선생의 책을 알게 되어 좋았다. 나도 한글날을 기념하여 우리글 바로 쓰기 세트(5권, 한길사)를 구입했다.
우선 글은 말을 옮겨야 하고 말은 생활을 옮겨야 한다. 우리는 자연스레 문어체와 구어체를 나눈다. 어려운 말을 쓰는 사람에게 '너 문자 좀 쓴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세종대왕이 우리말과 글을 만든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사대사상 때문에 혹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말을 끊임없이 사용해 왔다.
조선시대에는 한글을 천한 사람이나 부녀자들이 쓰는 말이라고 인식되었었다. 그래서 양반들은 여전히 한자를 사용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부역자들이 적극적으로 일본어를 사용했고 민족 말살 정책으로 일본어 공부를 시켰다. 최근에는 영어로 물든 세상을 만나게 된다. 물론 우리 생활 깊이 파고든 말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상대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얘기를 하는 것은 배려가 부족한 것이며, 언어 민주주의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이오덕 선생은 언어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말만 써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다. 적어도 쉽게 풀어쓴 수 있는 한자어는 풀어서 쓰자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나물을 채집하고 사과를 채집한다'라는 문장을 우리 글로 옮기면 '나물을 뜯고 사과를 딴다.'가 된다. 의미는 쉽고 문장의 풍미는 늘어난다. 그리고 일본어 '노(の)'가 뜻하는 '의'를 기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우리 글의 리듬을 헤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필요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일본식 '의'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문장 전체를 고쳐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우리 글이 되는 것이고 리듬을 되찾는 것이다. 그럼에도 '고향의 봄'의 첫 구절 '나의 살던 고향은 ~'에서 '내가 살던 고향은'으로 고칠 수 없겠다고 느낀 것은 전 국민이 너무 익숙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지금 서울 시내 간판보다 LA 코리아 타운의 간판에 한글이 더 많을 정도로 우리는 한글을 등한시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에 DMC역이라고 적혀 있다고 해서 찾아보니 '디지털 미디어시티'라고 되어 있었다. 다행히 한글로 적혀 있기는 한데 역사 이름은 한글로 하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우리 글에 포함되는 어려운 한자와 영어는 듣고 보는 사람의 배려가 필요할 것 같다. 공공장소의 표기는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인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은 공감한다.
잘못된 표기는 도로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고 발생지역'은 자연스레 사고가 발생했던 지역으로 인식하지만 뜻으로만 본다면 사고가 발생하는 지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주 사용되는 '서행'은 서쪽으로 가라고 인식할 수도 있다. 그냥 '천천히'라고 된다. 빠른 판단이 필요한데 다른 나라 말을 써서 한 번의 해석이 필요한 낭비를 줄이는 것은 어떨까?
한자들은 같은 발음에 다른 뜻을 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문장의 맥락을 봐야 한다. '패자'는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된다. 우리말은 명사보다는 동사로 그리고 능동의 형태가 자연스럽다. 일본어의 리듬인 피동문과 조사가 한글에 스며들어 리듬을 헤치고 있다. 영어의 번역본들은 직역을 하다 보니 영어에서 자연스레 쓰는 피동문이 등장한다. 우리말에는 없는 과거완료를 억지로 만들기도 한다. 영어 철자 틀리면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한글 맞춤법 틀린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어느 말이 우리말일까?
어려운 것들은 기득권층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만들어져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절과 에티켓은 전부 양반, 귀족들이 자신들의 어려운 문화를 만들어 서민, 천민들이 익힐 수 없도록 만들고 너네와 우리는 달라라는 시그널로 세뇌시킨다. 이것들은 배려와 사뭇 다른 것들이 많다. 숟가락에 젓가락을 끼워 먹으면 어떨까 밥만 잘 먹으면 되지. 포크와 나이프를 반듯이 놓지 않는다고 무례한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방정환 선생은 우리 글에서 장유유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존대를 하자라고 주장했다. 말의 민주주의의 실천이다. 법정에 서면 가장 중요한 피고와 원고는 법정에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모른다. 병원에서 환자는 의사들의 어려운 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들은 어려운 단어를 선별해서 쓴다. 그리고 독자의 어휘력과 문해력을 탓한다. 그렇다면 최근에 줄임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도 어휘력이 달리는 것이다.
말에는 배려가 필요하다. 서로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으로 하는 것이 좋다.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레 쓰는 말이 글이 되는 것이 좋다. 한글날 우리는 우리 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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