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은 서부의 총잡이들과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 일 거라고 생각했다. 흥미를 위한 소설일 것이라고 착각한 것에는 북커버의 역할도 있었다. 한동안 다른 책들 사이에 끼여 있었고 지금에서야 페이지를 열어보게 되었다.
책을 덮고 나서야 표지의 그림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복잡한 감정이 들게 만드는 초상화는 어째서인지 깊은 슬픔이 있었다. 문학을 책으로만 배운 작가의 오랜 열정이 가득한 이야기에 여운이 돌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이 책은 지금에 유행하는 트렌드에서 꽤 많이 벗어나 있다. 오히려 고전에 가까운 느낌을 받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등과 같은 철학적 질문과 함께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사회 저항의 문장마저 담고 있다. 그 배경이 학교 안에서의 작은 소란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그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품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60, 7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학생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지켜야 하는 가치에 항거하며 들불같이 일어났던 지난날의 투쟁은 많은 것을 얻었음에도 그 자리에 머문 듯한 느낌은 극 중 민재와 기윤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학칙의 부당함에 항거해 게릴라전을 펼치고 대자보를 붙이는 과정과 학교의 강경한 정책 등은 작은 모형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민재를 통해서는 부모가 설계해준 삶에 따라 저항하지 못하며 자라난 아이의 투쟁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 당시에는 군부 독재가 있었다면 이야기 속에는 학교의 학칙과 아이의 의사를 무시하고 앞날을 설계하는 부모의 독선이 있었다.
최근의 청소년 소설들에서도 이런 주제의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그들의 마음 상태를 묘사함으로써 공감을 끌어내는 정도가 보통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들을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모습으로 그려낸다. 그런 모습에서 공감보다는 처절함과 안타까움이 생기며 더 나아가 젊었을 때 저렇게 맹렬히 무언가를 지키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가라며 자문하게 된다.
작가는 글쓰기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오직 20대를 좋은 책을 읽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첫 문장을 쓰기까지 2년이 넘게 걸렸고, 4년을 고쳤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친 뒤 세상에 나온 책이다. 최근 트렌드의 책들과 사뭇 다르다. 작가의 생각과 의지가 느껴지는 힘 있는 작품이었다.
물 밀듯이 밀려드는 새로운 것들 속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질문과 함께 우리는 귀한 것을 잊고 지내는 것이 아닐까. 세상의 흐름 속에 당당히 레지스탕스가 되어서 나의 소중한 가치를 지켜나가지 않겠냐고 주장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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