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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としての小說家(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야곰야곰+책벌레 2024. 6. 19.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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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상이라는 걸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노벨 문학상은 별개로 보는 듯하다. 노벨 문학상은 어느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일생에 주는 상이기 때문인 것 같다). 자신도 '군상 문학상'으로 등단을 했지만 상이라는 건 좋은 글을 뽑겠다는 의지보다는 마케팅에 의미가 더 있는 듯하다는 감상이다. 글이라는 것은 독자가 판단해야 하는 것이기에 누군가의 글을 좋다 나쁘다고 판단할 수 없어 자신은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신구 구장에서 야구를 보다가 불현듯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리고 가게를 마치고 주방의 테이블 위에서 글을 썼다. 그리고 보란 듯이 입상을 했다.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가게를 계속했다. 가게는 제법 잘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전업 작가가 되기까지는 여러 결심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하루키 작품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박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글만 썼다. 그랬더니 사회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평론가들은 비판했다. 번역을 하던 하루키는 번역을 일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만들었다. 그랬더니 그의 문체가 이상하며 비판했다. 그래서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인정받았더니 일본 내에서는 하루키의 글은 외국인이 읽기 쉬워서 인기가 많은 거라며 평가 절하했다.

  그래서 하루키는 평론가의 말을 그다지 신경 써지 않는다. 세상에는 어떻게든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일정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단다. 대신에 독자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한다. 지갑을 열어 자신의 책을 읽어주는 독자에게는 좋은 글을 보여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책을 읽고 의견을 내어 주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행여 "이번 책은 저에겐 재밌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독자의 말도 귀담아들을 줄 안다.

  소설가는 결국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현시대에 드러나지는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힐난받다가도 어느 시대에는 추앙받는 작품들이 종종 있다. 그것들은 작품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틀스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도 세대를 떠나서 사랑받는다는 이유가 바로 오리지널리티다. 그래서 하루키는 부모와 자식, 조부모와 손자가 자신의 책을 함께 읽고 얘기를 나눈다는 얘기를 들으면 기뻐한다. 세대를 넘어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설가가 될 거야'라는 마음먹고 훈련하고 습작을 쌓아가는 것만으로는 소설가가 될 순 없다.  소설가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소설이 되어 가는 과정을 체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책이 훌륭하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안목을 기르는 훈련이 될 수 있다. 그런 다음 자신이 본 사물이나 사상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원형 그대로 가능한 많이 모아둬야 한다. 많은 원재료를 축적하면 글을 쓸 때 자연스레 나온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건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인상 깊은 재료는 자연스레 기억에 남게 된다. 상상력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맥락 없이 이어진 단기 기억들의 조합일 뿐인 것이다.

  글을 쓸 때에는 소재의 중후함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편이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니 소설을 쓸 소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소설을 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하루키도 '이런 건 소설도 아니야', '문학이라고 할 수 없어'라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했다. 지금도 그저 좋은 글을 쓸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했다.

  소설가가 되기로 했다면 주위를 신중하게 살피자. 세상은 재미없는 거 투성이 같지만 실제로는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인 것이다. 

'시간이 있다면 더 좋은 것을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랄 말이다. 힘이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쓰지 않는다면 왜 소설을 쓰려는 것인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힘껏 해냈다고 말할 수 있는 증명. 소설가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것은 이것뿐이다. 쫓기듯 글을 쓰지 마라. 그러면 어느 시기에 자신도 모르게 작풍이 빈약해져 있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이다. 홀 서재 책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부터 가공한 이야기를 쌓아 올려 그것을 문장의 형태로 바꾸는 일이다. 형태가 없는 주관적인 것을 형태를 가진 객관적인 것으로 바꿔 낸다. 그것이 소설가의 일상이다. 주위의 왁자지껄함, 흔들리는 테이블, 노트에 흘린 커피 때문에 힘들던 하루키는 자신이 그러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세상 어느 곳이든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소설을 쓰는 재능이 있다고 해도 그건 유전이나 금광과 같아서 채굴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그 재능이 얕게 묻혀 있다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도 있겠지만 깊게 묻혀 있는 재능은 간단히 찾을 수 없다. '좋아, 여길 파보자'라고 삽을 들고 파는 사람이 없다면 재능은 영원히 찾지 못할 수 있다.

  모두를 기쁘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저 자신이 가장 즐거운 글쓰기를 하면 된다. 그러면 평판이 나빠져도 책이 잘 팔리지 않아도 "뭐 어때. 적어도 나는 즐거웠어"라고 납득할 수 있다. 물론 프로로서 대중의 최소한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즐길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글을 쓴다면 오래 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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