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우가 생물학자였다면, 아니 시인이었다면 이렇게 글을 쓰지 않았을까?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자연 속에서의 삶은 어떨까? 한가로울까? 하지만 적어도 소로우와 니나 버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연을 이토록 세심하게 관찰하려면 도심에서 살 때 보다 더 바빴을 것 같다. 오랜 시간 비워 둔 별장에서 만난 수많은 생명체와의 만남. 텅 비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곳은 가득 차 있었다.
자연에서 느낀 감각을 글로 적은 이 책은 열린책들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자신을 아마추어 생물학자로 소개하는 그녀는 생명체에 대해 굉장히 해박한 지식을 보여준다. 그녀가 별장에서 만난 자연 하나하나는 그녀에게 특별한 깨달음을 전달했다. 그것은 그것에 관심을 두고 부지런히 관찰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자연을 받아들일 자세가 이미 되어 있었다고 할까.
한가해서 심심할 것 같은 자연 속 삶은 글을 읽어보면 한 눈 팔 새도 없이 바빴을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지붕 위 새들과 다람쥐로부터 벽을 타고 다니는 개미 그리고 땅 속의 오소리 마지막으로 별장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까지. 자연은 그들만의 언어와 규칙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인간보다 더 치열하고 때론 더 발달된 모습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생태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작가는 이런 아름다운 비유속에서 인간 중심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생명은 평등하게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초유기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 속에 인간은 어디 차지하고 있을까. 초유기적인 움직임에 해방을 놓고 있는 건 아닐까.
모든 생명들이 서로의 삶에 걸쳐져 있다는 걸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도시라는 섬에 떨어져 사는 인간일수록 더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섬에서 발을 딛고 나설 때 비로소 인간의 감각은 확장될 수 있다. 인간 역시 세상이 일부분이라는 자각을 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지구 위에 외로운 존재일 뿐이지 않은가
어느 생명체가 깨달음을 얻으면 다른 생명체는 그것을 보고 배운다. <100번째 원숭이 효과>라는 것은 결국 인간도 많은 기술을 자연에서 보고 흉내 내고 있으므로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지성으로 모든 것을 해낸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태초에 우리는 모두 시아노바이러스였고 미토콘드리아였다. 쥐와 인간의 DNA는 80%가 흡사하고 유인원들과는 98%가 비슷하다. 인간이 나무에서 떨어진 '루시'를 가장 먼 조상으로 알고 있지만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는 지구의 자식들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교양과학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에세이 같은 이 책은 역시 시인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자연에 대한 시인만의 독특하고 깊이 있는 사유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마치 2024년 월든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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