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를 마시는 입장에서 살펴보면 여러 가지 안타까운 점이 분명 있다. 일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점점 벌어진다. 업무시간 회사 한쪽 구석에서 게임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준만큼 일하는 것이 멋이라고 얘기하는 그들은 정말 받은 만큼 일하고 있는 것일까? 일한 것보다 더 받고 싶은 것일까?
일에 시달리다 보면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넘쳤으니 조금 모자라게 하겠다는 생각 정도는 지금의 나도 하고 있는 생각이다. 그런 시간에 에너지를 축적하고 새로운 것을 익히고 사고를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저자 우치다 타츠루는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원인으로 꼽는다. 세대가 게을러졌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대는 그런 행동이 합리적인 것이라는 메시지를 계속 주었다고 얘기한다. 그것은 공동체의 붕괴와 성급한 자기 완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심에는 노동과 소비가 있다.
개인주의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산업은 점점 더 핵가족화를 만들어 이제는 일인 가구의 수를 급격히 늘리고 있다. 공동체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책임진다는 것은 꽤나 심플하고 멋져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개인들을 고립시키고 있다. 주체적인 것과 고립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에게 인정받음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주체적인 것'이다. 홀로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건 오히려 '고립'에 가깝다.
서로 상관 말자라는 생각과 행동은 지금의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나 또한 대부분 나의 선에서 해결하고자 한다. 내어 주는 건 상관없지만 받는 것에 대해서는 민감한 편이다. 'Give & Take'의 문화 양식의 부담감이라고 할까. 확실하지 못한 계산서를 받아 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주는 내 마음은 명확하지만 주는 상대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또한 뭔가를 줄 때마저 조심스럽게 된다.
'인정 욕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욕구 중에는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철저히 약자였던 어린 시절에는 이런 욕구를 집안일을 도우며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가능은 하지만 어진한 해서는 잘 시키지 않게 된다. 그만큼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준다. 반대로 손에 쥐어진 돈으로 소비하는 경험은 일찍부터 하게 된다. 타인으로부터의 존중을 손에 쥐어진 돈으로 경험할 수 있다. 자신 가까이 존경을 표하는 어른의 모습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라면 '소비'라는 것에서 더 많은 사회적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따져봐야 하는 문제는 학교를 거부하는 학생들의 태도가 물건을 흥정하는 소비자의 태도로부터인가라는 의문이다. 소비자는 물건에 대해 합리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알지 못하는 물건에 대해서도 아는 척을 해야 한다. 우선 튕겨 보는 것. 그것으로 배움과 흥정을 하게 된 것일까? 일리가 없지는 않을 것 같다 (스스로 느낄 수는 없겠지만). 흥정의 대상이 존경스러울리는 없다. 학교는 사제 지간이라기보다는 '딜'의 현장이 된 것일까?
하지만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배움'이라는 건 물건을 사고 팔만큼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배우면 뭐가 좋냐요?라고 묻는 학생은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 있지만 배워도 뭘 할 수 있을지는 가르치는 사람만의 몫은 아니기에 조금 당황스러운 질문이기도 하다. 결국 직업과 돈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런 논리도 인문학, 철학을 비롯한 여러 과목들이 외면당한다. 책은 읽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실용 서적 위주로 팔리고 조금 더 확장해서 본다면 돈을 버는 것이나 자기 계발서까지만 팔린다.
거절하는 것인 '쿨한' 사회가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배움이라는 건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적어도 초등학교까지는 그런 듯하다. 아이가 걷고 말을 익히는 것과 같이 그저 배우는 것이다. 여러 배움을 익혀 연결하는 건 본인의 몫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배워서 결과가 명확한 의사, 한의사, 약사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다. 그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많은 젊은이들은 노동으로부터도 도피를 시작하게 된다. 멋지지 않은 걸 하는 건 '힙'하지 못한 것이니까.
배움에는 왕도가 없다. 하지만 여러 SNS에서 열광하는 건 "벼락부자"다. 차근차근 따박따박 성장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핸드폰 터치 몃 번으로 돈을 벌 수 있는데 나무를 심어 팔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다.
하지만 그마저도 뭐라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노력이 결과로 이뤄지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실 노력이 결과로 바로 나타나는 경우가 드물지만 비즈니스 형태 혹은 게임의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즉각의 보상 없음은 불합리한 것이 되고 만다. 이제는 기다리는 것마저 손해인 사회가 되어 버렸으니까.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진다는 건 이제 기본적인 생각인 듯하다. 하지만 그것을 담보할 수 있는 건 미래의 나뿐이다. 너무 쉽게 미래의 나에게 리스크를 만들어 내고 있진 않고 있는지 고민을 해보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다. 동시에 개인들에게 계속 '결정하고 책임져라'라고 내몰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한다. 함께 결정하고 함께 책임지는 리스크 헷지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이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인데 너무 획일화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시대가 흐를수록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배움이 무슨 소용이냐며 집어던지는 것이 보통의 것이라면 더 악착같이 배우고 있는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이다. 그 둘 사이에는 재력이 차이만 있는 게 아니라 '배움이 가져오는 효용의 실감'이 다르다. 어쩌면 사회의 불평등은 그런 '효용감'감을 다르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오래된 책이고 나이가 있는 분의 얘기라 시대적으로 살짝 갸우뚱하는 부분도 있지만 배움에 대한 감각과 많은 젊은 세대의 '도피'에 대한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지금의 모습을 '의지박약'으로 해석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풀어내는 모습이 좋았다. 이전 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읽으면 "또 라떼 시전하고 있네"라고 폄하할 수 있겠지만 충분히 좋은 통찰이었단. 단지, 해결책에 대해서는 좀 더 현대적인 감각이 필요할 듯했다.
'독서 (서평+독후감) > 정치 |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평)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2024) - 열린책들 (0) | 2024.06.12 |
---|---|
(서평)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박찬운) - 혜윰터 (1) | 2024.03.25 |
(서평)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마틴 푸크너) - 어크로스 (0) | 2024.03.09 |
(서평)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 (나오미 클라인) - 모비딕북스 (0) | 2024.02.05 |
(서평) 커리어 그리고 가정 (클라우디아 골딘) - 생각의 힘 (2) | 2023.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