릿터 39호에는 좋은 산문이 많다. 다양한 소재, 다양의 무게의 작품들이 담겨 있다. 정이현 님의 글은 다음 이야기가 사뭇 궁금하다. 모스크바의 전철 이야기로 풀어내는 이종현 님의 이야기도 읽는 즐거움이 있다. 장류진 님의 신간이 될 것 같은 '노랑이 있는 집'의 일부분이 실려 있기도 했다. (생각보다 느린 느낌이 들었지만 딱 중요한 부분에서 끊어 궁금증을 유발하는 편집자님의 노련함에 박수를...) 그리고 서평과 수상작들이 담겨 있다.
문학잡지의 꽃은 아무래도 산문이 아닐까 싶다. 약간 종합선물세트라는 느낌이 있다. 책으로 일일이 찾아서 보려면 어려움이 분명 있었을 거고 투고된 글 중에는 이곳이 아니면 읽지 못하는 것도 많을 거다. (대부분인가)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소개하며 엄마와 딸 이야기를 풀어가는 정이현 작가의 글이 맨 처음에 위치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듯하다. 애피타이저처럼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그렇지만 또 흥미로움이 가득하다.
내 얘기는 쓰지 마.
이렇게까지 명확하고 결기 어린 모습은 처음이었다.
알겠어.
그냥 나를 아예 등장시키지 마.
그럼에도 이 일화를 소개하는 엄마를 용서해라.
평범하면서도 공감 가는 일화로 시작되는 글. 엄마와 딸의 미묘한 줄다리기 속에 어쩔 수 없는 속상함과 미안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엄마와 딸의 묘하게 이어진 감정선의 이야기가 다음호까지 이어지기에 빨리 40호를 넘기고 싶어 진다.
에밀리 디킨슨의 'After great pain, a formal feeling comes'를 소개하며 시를 읽는 깊이와 즐거움을 얘기하는 정은귀 교수의 글은 그 자체로 깊이가 있다. 모국어로 쓰인 시마저도 그 깊이를 헤아리기 쉽지 않은데, 외국어로 쓰인 시야 말로 어떨까. 번역에는 공감이 필요하다.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해야 하는 시를 번역해야 한다는 것은 행운이었을까. 모국어였다면 그냥 쓱 읽고 지나쳤을 법했을 텐데, 번역이라는 도구로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보는 저자의 과정이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한 구절의 의미가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거기 따라붙는 무수한 경우의 수가 좋았기에 나의 시 공부는 늘 질문으로 가득했다. 나는 답보다는 질문이 많은 사람, 어쩌면 질문은 공부하는 사람의 어떤 자세이자 윤리가 아닐까.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지만 거꾸로 내려놓음으로써 우리는 살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은 다시 우리를 삶의 자리로 돌려세운다. 이 끔찍한 납의 시간을 견디게 하는 힘이 거기서 나온다.
모스크바의 혹한의 겨울을 느끼며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것을 후회했다는 이종현 문학 연구가가 말하는 러시아 전차 이야기는 재밌다. 구소련의 유물 같은 전차는 이국땅에서 따스함을 제공했다. 따스한 온열시트에 앉아 한산한 전철 속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 자체로도 서러움을 잊기에 충분했다. 전차를 타고 가며 만난 러시아의 풍경들과 러시아 문학들의 이야기 속 풍경이 겹쳐진다. 이래서 문학을 전공하면 여행을 떠나야 하나..
작가에게는 온화하고 너그러운 육체적 촉감이었지만 러시아 문학에서 표현하는 전차의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미하일 불가코프의 소설 '거장과 마르카리타'에서는 초반부터 전차에 치여 죽는 씬이 등장한다. 보로디노 평원을 지나며 여기가 '전쟁과 평화'의 무대구나라고 감탄하기도 잠시 파트리아르시의 연못을 걸어며 '바로 여기가 그 베를리오즈의 머리가 날아간 곳이군'이라고 얘기하는 묘한 반전이 있다.
아이러니하다. 벤야민, 볼가코프, 파스테르나크가 그리는 전차 장면을 두고는 나의 '촉각적' 전차가 아니라며 고개를 돌리더니 전차를 모는 살아 있는 I를 만나고서는 늦을세라 전차를 그린 예술 작품을 찾는다.
박지영 작가의 '누군가는 춤을 추고 있다'는 우리 사회의 멸시에 대한 얘기인데.. 사뭇 흥미로우면서도 아프다. 쌍년으로 멸시받는 민주의 삶을 얘기한다. 쌍년이라는 멸시 속에서 가스라이팅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만만해 보이는 것'이 스펙이 되어 버리는 인간의 모습. 남들에게 쌍년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자신을 더 쌍년으로 만드는 모습.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이라는 자기 합리화 속에 모욕당하면서도 모욕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모욕이라는 단어는 희미하거나 어렴풋한 기억에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분명하고 선명하게 상처를 남기고 끈질기게 달라붙어 괴롭히는 것. 그런 것에만 마땅히 모욕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었다.
반대로 화자는 변명하기 바쁘다. 민주가 모욕을 당할 때 아무것도 하질 못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변명만 내놓을 뿐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멸시를 바라보면서도 차마 그것이 나에게 튈까 봐 노심초사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일이 지난 뒤에야 그들의 얘기에 공감하는 척하는 건 거저 우리의 부채의식을 덜어줄 변명 같은 건 아닐까.
그들이 내게 받은 모욕을 기억하고 산다는 건 나로서는 너무 슬프고 부끄럽고 아픈 일이지만 그들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그들이 이미 너무 많은 더 큰 모욕에 노출되었거나 그 후로도 수없이 많이 노출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리뷰를 많이 하는 입장에서 작가들의 리뷰를 읽어보는 시간이 좋았다. 좋은 책들이 많이 소개되어 좋았다. 나의 장바구니는 또 잔뜩 부풀었다. 특히 크리케고르 평전인 '마음의 철학자'와 전기적 글쓰기 '교차 3호'의 이야기가 좋았다.
우리는 개인이지만 늘 누군가와 함께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 그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필수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전기는 한 사람의 기록인 동시에 타인에 대한 가장 다성적인 탐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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