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는 반말과 높임말이 존재한다. 공손과 겸양의 동양 문화는 언어에 녹아 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우리의 자랑이기도 하다. 삶이 하나의 지식 권력이었기도 했고 먼저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장유유서'라는 말에서 그것을 잘 느낄 수 있다.
좋은 기능과 함께 어두운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로부터 어려운 것은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세뇌로 사용되어 왔다. 양반과 귀족의 예법과 매너는 그 자체로 교양과 젠틀함을 의미하고 있지만 이것은 그것을 배울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의미하기도 했다. 기득권이 아닌 사람들이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드는 목적이 예법과 매너에 스며 있다.
높임말은 그런 면에서 보면 기득권 보호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나이가 벼슬이냐'라는 말과 같이 사람은 사람이기에 존중하는 것이지 나이가 많다고 존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와 직급이라는 사회적 권력을 모든 것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사회적 보상이기도 하겠지만 하나의 폭력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우리 중에는 수평적인 문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대기업들은 직급을 없애고 '프로님'이라고 얘기한다. 때론 전 직원이 영어로 업무를 보기도 한다. 영어 이름을 만들어 호칭만을 영어로 하기도 한다. 서로 높임말을 사용하는 것도 이제는 그렇게 특별한 것들은 아니다. 아이와 대화할 때에도 서로 높임말을 쓰고 부부 사이에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하다.
반말의 경우는 굉장히 독특하다. 릿터에서는 이를 '평어'라고 얘기한다. 평어와 반말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평어는 풀이를 보면 보통말, 수평어, 예사말로 되어 있지만 반말은 낮춤말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평어를 반말과 동급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낯설어하게 되며 거부감을 느낀다.
높임말은 상호 존중의 분위기를 준다면, 평어의 경우는 상호 친밀감을 준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개인의 성향이기 때문에 강제할 수 없다. 높임말이 반말보다 훨씬 편한 나와 같은 경우도 그렇다. 사람마다 편하다고 생각하는 심리적 거리는 다르다. 친밀해야만 좋은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지며 읽어볼 수 있다.
평어 사용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야자타임'과 동급으로 본다는 것이다. 야자타임에서 가장 신나는 건 막내일지 모르겠지만, 곧 현실로 돌아올 것이기에 그마저도 쉽지 않다. 평어의 존재는 가족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이에 민음사는 직접 사내에 평어 사용을 실험해 보고 있다. 민음사 커뮤니티도 평어로 작성되어 있기도 하다. 나도 민음사 커뮤니티에서 평어를 써봤지만 조금 어색해서 그렇지 쓸만했다.
높임말이 반말보다 어려운 내가 커뮤니티에서 쭈뼛쭈뼛 거리며 평어를 쓸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신뢰' 그리고 '분위기'였다. 민음사 커뮤니티에서 사용된 평어체는 높임말과 반말 어느 중간 즈음에 있었다. 반말을 하고 있지만 다들 차분했다. 민음사 커뮤니티에서는 반말이 가지는 '공격성'을 느낄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상호 비방의 댓글들이 없었다. 이 종이 한 장 차이의 아슬아슬함을 유지하며 평어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반신반의하면서 읽어 나갔다. 박혜진 님의 글을 읽으며 솔직하다는 감각이 닿았다. 평어 사용에서 가장 불편해야 할 사람은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반증. 어쩌면 그마저도 기득권일 수 있다는 생각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불편했기에 평어 사용은 수도의 자세가 필요했고 마음의 고요를 유지하는 힘이 필요했다. 직급이라는 권위로 일사천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아주 신중히 고생스럽게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평어라는 것은 아슬아슬함이 있어 자칫 비난의 칼날로 바뀌기 쉽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나는 여전히 상호 존중의 언어를 좋아한다. 아무리 쏟아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 말을 좋아한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 기계가 실수하지 않도록 인터락을 걸듯 높임말은 나에게 인터락 같은 장치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하니까. 어쩔 수 없는 기득권의 자기 보호 본능인지도..
책에도 담겨 있듯 격렬한 토론이 많은 일반 회사에서 평어 사용은 쉬운 일이 아닐 거다. 언어가 문화를 담고 있기에 우리는 평어를 능수능란하게 쓸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는 박혜진 님의 글이 모든 것을 얘기해 준다. 배우고 싶은 사람은 배우고 쓰면 되고 그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면 너도 나도 배우려 할지 모를 일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또한 다양성이다. 조금은 괴롭고 시끄러워도 양극화보단 자잘한 분열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그 방향이 맞다고 얘기한다면 분명 그렇게 흘러갈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여전히 물음표가 있지만 평어를 쓰는 이들을 인정하고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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