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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죽음이 물었다 (아나 클라우디아) - 세계사

야곰야곰+책벌레 2022. 11. 2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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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다 굴삭기가 파놓은 구덩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물속 깊이 빠졌다 다시 운 좋게 제자리로 돌아온 기억이 있다. 교통사고를 극적으로 피한 순간도 있었다. 축의금을 내러 가는 횟수보다 조문을 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죽음은 어느샌가 내 옆에 와 있다. 나이 든 부모님을 뵈면 문득 어떤 기분으로 마주해야 하나 상상을 해보다가도 이내 떨쳐버리고 만다. 죽음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은 단어다. 저자가 얘기한 눈을 가리면 마치 마주하지 않을 것은 기분으로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에 대해 직설적으로 얘기하며 죽음은 마주해야 하는 소중한 기회라고 얘기하는 이 책은 세계사 콘텐츠 그룹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원래부터 완화 치료, 안락사를 지지하는 편이었다. 태어나는 것은 선택하지 못했지만 떠나는 것은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있다. 그런 면에서 자살 또한 슬픈 일이지만 자신의 선택이다. 세상이 그들을 품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있을 뿐 그 어떤 비난도 할 수 없다. 생에 마침표를 찍을 만큼 마음의 정리가 다 되었다면 책은 덮어야 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마무리를 하지 않았다면 고통스럽지 않은 끝맺음을 할 수 있도록 완화 치료는 필요하다.

  어느 책이었는지 기억나질 않지만 죽음이 당도했을 때 꼭 자신의 가족들이 살았던 집에서 가족들과 끝을 맺도록 했다. 그것은 떠나는 자가 가장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의사는 편히 갈 수 있도록 몇 차례 방문하여 치료를 할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완화 치료였던 것 같다. 최근에는 죽기 전에 장례식을 올리는 사례도 늘고 있다. 살아생전에 소중했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작별을 하는 장례식이다. 죽고 난 뒤에 와서 슬퍼하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경험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 나는 책의 초입부터 자연스레 동화되어 갔다. 지속적으로 '죽음은 피할 수 없다'라는 말을 되뇌는 저자의 문장에 쫓기듯 숨이 차기도 어느 순간엔 격한 동요가 일었다가 잔잔한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죽음은 탄생만큼이나 위대한 순간일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한다. 만물에게 공평하게 나타나는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발버둥도 소용이 없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벽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비로소 솔직해질 수 있다. 그 위대한 벽을 넘을 순 없다. 결국 모퉁이를 돌아가야 한다.

  죽음의 순간을 염두에 두고 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참으로 녹록지 않다. 공수래공수거라 했지 않던가. 그럼에도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더 가지려고 죽음의 시계를 재촉한다. 마치 가로등에 부딪치기를 계속하는 하루살이처럼 그렇게 뭔가에 홀린 듯 제 몸 다치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나 또한 예외가 될 순 없는 것 같다. 저자는 '존재적 좀비'라고 했다.

  죽음은 생을 마무리하는 위대한 의식이다. 상실에 대한 수용. 즉, 죽음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삶의 순간마다 했던 선택은 뒤돌아 보면 아쉽지만 당시에는 최선이었을 거라고 자신을 토닥여줘야 한다. 모든 일은 마침표를 찍어야 다음 일을 할 수 있듯. 죽음을 마주하려면 그래도 잘 살은 인생이다라는 마침표를 찍어주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저자는 죽음이라는 근본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현상과 그것의 중요함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 의식을 도와줄 완화 치료사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당부하고 있다. 또한 죽음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의학계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같은 얘기를 다른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의사들은 환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병을 보게 된다며 좋은 의사가 되려면 환자를 바라보는 의사가 되어야 된다고 했다. 병원에 오는 많은 환자들이 가진 병에게 이길 수 없다. 사람은 결국 죽기 때문이다. 병에 집중하는 의사는 백전백패다. 패배주의에 빠진 의사는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리터의 눈물>이라는 책을 드라마 한 작품을 보면 불치병에 걸린 아이에게 병을 알리지 말자는 부모의 말에 의사는 동의한다. 의사는 자신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이 깊어져 아이가 결국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의사에게 울부짖는다. "선생님, 돌려줘요. 돌려 달라고요. 이럴 줄 알았다면 더 많이 뛰고 더 던지고 했을 텐데.."  그 경험으로 의사는 다음 환자에게는 병명을 정확하게 얘기해주고 함께 노력하자고 얘기한다. 병을 마주하는 것.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병을 제대로 받아들이기까지 1리터의 눈물을 흘렸을 거라는 드라마의 주인공 킷토 아야의 말이 생각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시간은 절실할 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시간도 중요하다. 죽음은 언제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 불치병에 걸렸다고 측은하게 여기는 사람이 다음 날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시간의 가치는 모두에게 똑같다고 얘기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사쿠라의 말처럼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다. 

  당신이 꿈꾸는 행복한 미래에 너는 존재하는가? 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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